일단 성관계 단절되면 `님`도 `남` 된다
82쌍 부부 추적, 이혼으로 추락하는 일곱 계단
여기 82쌍의 부부가 있다. 이들은 이혼소송에 휘말려 법원을 오가고 있다. 별거에 들어간 부부가 많다. 동거를 계속하는 부부도 적지 않다. 어느 경우든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은 아이들 입을 통해서 한다. 상대방에게 0.001%의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슴속 휴화산이 폭발하는 순간이 있다. 가정법원에서 사실 조사를 받기 위해 마주 앉았을 때다. 조사관 앞에서 심한 욕도 서슴지 않는다. 완전한 남남. 완벽한 단절 단계(7단계)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항상 서로를 신뢰하며 사랑할 것을. 이들의 결혼서약은 어디로 간 걸까. 서울가정법원 김요완 조사관(교육학 박사ㆍ상담 전공)은 이혼소송 중에 있는 부부가 걸어온 마음의 행로를 역추적했다. 우선 자신이 조사한 402쌍의 부부 중에서 분쟁 정도가 심한 82쌍을 골라내 면접을 하고, 이 중 6쌍을 심층면접했다.
갈등발생 단계(1단계)는 신혼 초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중치 못한 결혼이 많았다. A부부는 술 마시고 잠자리를 함께했다가 덜컥 임신을 했다. 계획에 없던 결혼이 내 불행의 시작이란 후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잦은 이직과 경제적 책임감 부족, 가정살림에 대한 무지, 지출에 인색한 태도,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 주된 갈등원인이었다.
B부부의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쥐여준 월급봉투는 얇았다. 그래도 그는 벌어다준 돈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아내를 타박했다. 그 돈으로 저축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아내는 몇 차례 다투다 입을 다물었다. 아내가 일하러 나갔다. 남편은 이번엔 왜 집안일에 소홀하냐고 트집을 잡았다.
외환위기가 없었더라면 부부들의 갈등 수위가 낮아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갈등의 골을 결정적으로 깊게 판 건 왜곡된 의사소통이었다.
나 오늘 힘들었어. 흔히 부부 사이에 나오는 이 말은 위로받고 싶다는 신호다. 하지만 뭐가 힘들다고 야단이야 "당신만 힘들어?"라는 답이 돌아온다. 남는 건 상처뿐이다.
결국은 밥이나 먹어 "밥 줘" 같은 표면적 대화만 오간다. 몸을 밀치거나 따귀를 때리고 욕을 하는 정도는 폭행이 아니라고 여긴다.
갈등이 깊어지면 자존감 손상 단계(2단계)로 넘어간다. 남편은 당신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시끄러우니까 그만 얘기해하고 아내를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아내는 쥐꼬리만큼 갖다줘 놓고능력도 없는 사람이라고 대꾸한다. 주고받는 말에 항상 짜증이 배어 있다. 약속을 번번이 어기는 것도 이 시기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혼 부부들은 인격을 존중받지 못하는 데 따른 자존감 손상이 폭력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반면 가해자는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C부부의 남편은 이렇게 20여 년을 살다 졸지에 이혼 법정에 서야 했다.
그 다음 나타나는 것이 갈등요인 무시 단계(3단계).
대화하려는 노력이 사라진다. 될 수 있으면 싸움을 피하려고 한다. 감춰진 갈등은 더 심화된다. 집에 오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입하기 시작한다. 집안일, 자녀 교육, 동호회 활동, 계 모임, 게임, 채팅, 술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마니아(Mania)라는 말을 듣는다.
상대방이 말을 붙이는 순간 양미간이 좁아진다. 오늘 나 너무 피곤하거든 나중에 얘기하자고 배우자의 입에 지퍼를 채운다. D부부의 남편은 아내에게 아프더라도, 나한테 아프다는 얘기는 제발 하지 말라고 했다. 상대방의 이성관계에 의심을 품는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단계가 이혼까지 가느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이다. 이때 상담이 이뤄지면 관계 회복이 가능하다. 자발적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
기회를 놓친 부부는 성관계 단절 단계(4단계)로 치닫는다. 여기에서 성관계는 포옹이나 키스, 팔짱끼기 등 가벼운 스킨십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배우자의 손이 자기 몸에 닿는 게 싫다. 눈 맞추는 것도 부담스러워진다. E부부의 아내는 남편에게 얻어맞고 나서는 남편이 가까이만 오면 소름이 끼치고,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정서로는 이미 이혼에 들어간 것이다. 이 상태로 평생을 살 수도 있다. 부부 강간으로 불리는 강제 성관계가 문제된다. 다른 이성과의 교제도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곧이어 찾아오는 것이 역할 중단 단계(5단계). 아내는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을 멈춘다. 자녀 식사만 챙기고, 남편 식사는 나 몰라라 한다. 남편은 생활비를 주지 않는다. 부부 중 한쪽이 가출과 귀가를 반복한다. 시댁이나 처갓집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친척들 눈에도 이상징후가 포착되는 시기다.
상호 공격 단계(6단계)에선 이혼소송을 결정하고 적극 공격에 나선다. 소송을 마음먹기까지는 고민 또 고민이다. 자녀 양육과 경제적 부담, 자녀가 받을 마음의 상처, 부모의 반대가 소송을 주저하게 한다.
일단 재판에 들어가면 처절한 전쟁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다.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간통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나왔음에도 끝까지 부인하는 것은 예사다. 상대방을 정신병자로 모는 경우도 있다.
일부러 화를 돋워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등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다. 도청기와 녹음기가 동원된다. 재산 빼돌리기도 적지 않다. F부부의 아내는 소송을 앞두고 점포를 담보로 수천만원을 대출받았다.
김 조사관은 2, 3개 단계가 겹쳐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일곱 단계의 모습을 보였다며 배우자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분석 결과를 재판상 이혼절차 중인 부부의 심리적 특성이란 보고서로 정리해 서울가정법원(법원장 이호원)의 가사조정위원 연수회에서 발표했다.
권석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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