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소극적이면 보스 기질 없다?

빙허 현진건이 일제치하에서 지성인이 술을 마시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절망적 사회 상황을 묘사한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한 시기는 1921년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달라졌다 해도, 85년이 흘러 세계 12위의 어엿한 경제대국이 된 지금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술 권하는 사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제일 먼저 찾는 방법도 술을 마시는 것이고, 기쁜 일로 축하해 줄 때도 한잔 하는 것을 권한다. 집안에서는 생일잔치결혼식장례식 등 대소사마다 으레 술이 따라다니고, 직장에서는 각종 단합대회회식환영식송별식승진주낙마주 등 다양한 명분을 가진 술자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는 술을 잘 마시면 출세할 사람이고, 술에 조금이라도 소극적인 사람은 뭔가 나약하고 보스 기질이 부족한 인사로 취급받는다.
하루에 1~2잔 이내로 적당히 마시는 술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적포도주를 자주 마시는 프랑스인들의 경우 치즈와 거위간 등 지방질 섭취량이 많음에도 심장질환에 따른 사망률이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낮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적정량을 초과한 술이 정신장애지방간위궤양, 중추 및 말초신경 손상 등 치명적 질병을 유발하고, 사회경제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자꾸 배가 나와 제 나름대로 운동도 하고 다이어트도 해 보았지만, 그때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배가 더 나오더라고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복부비만 때문에 병원을 찾는 남성 환자들로부터 가장 흔히 듣는 말이다. 이 경우 필자는 먼저 환자의 음주 습관을 물어본다. 남성들에게서는 과도한 음주 습관이 운동이나 다이어트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사례를 자주 보기 때문이다.
소주 3잔에 돼지고기 200g 열량 있어
남성들은 집에서 하는 아침식사나 근무시간 중에 하는 점심식사는 비교적 절제를 잘하지만 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밤문화에는 매우 취약하다.
흔히 술자리에서는 식사를 같이하거나 안주를 곁들이게 되는데, 술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어서 술을 마시면 평상시보다 음식을 훨씬 많이 먹게 된다.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다시 식사를 해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
더욱이 술의 주성분인 알코올에는 1g당 7kcal에 해당하는 열량이 들어 있는데, 이로 인해 비만이 더욱 가중된다. 물론 알코올은 이른바 텅 빈 칼로리(empty calorie)로 단백질이나 비타민무기질 등 다른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지 않고 바로 산화돼 직접 체내에 축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알코올에서 나오는 열량이 인체의 활동에 먼저 사용되기 때문에 술과 함께 먹은 음식이나 안주에서 나오는 영양분은 거의 지방으로 바뀌어 체내에 축적된다.
소주 3잔이나 맥주 500cc 한 잔을 마시면 밥 한 공기나 돼지고기 1인분(200g)을 먹은 것과 같은 열량을 낸다. 남자들이 술자리를 한 번 하면 대개 소주는 한두 병, 맥주는 1,000~2,000cc 정도를 마신다고 하니 술과 살이 어떤 함수관계인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술을 마시는 시간은 잠자리에 들기 직전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때 얻어지는 지방은 낮에 섭취하는 음식에 비해 고스란히 우리 몸속에 축적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술로 인해 형성된 지방은 남성의 경우 대개 내장 속에 축적된다. 때문에 내장지방은 외관상으로는 더 나을지 모르지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피하에 축적된 지방에 비해 그 위험도가 훨씬 높다.
내장지방은 일종의 독과 같은 것으로, 해로운 물질을 분비하거나 혈액으로 바로 녹아들어 당대사나 지질대사에 이상을 일으켜 당뇨병고혈압고지혈증관상동맥질환 등의 원인이 된다. 이런 종류의 질병은 노화를 촉진하고 암을 유발해 수명의 단축을 초래한다.
여성의 경우에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작용으로 남성과 달리 형성된 지방이 내장보다 피하에 먼저 축적된다. 다만 여성의 경우에도 폐경기에 접어드는 50대 이후에는 여성호르몬이 줄어들면서 내장비만이 급격히 증가한다.
풍부한 음식과 자동차문화, 노동 형태의 변화 등으로 생활 패턴이 달라지면서 술 자체의 성분에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은 더욱 커졌다. 따라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매개로서 술에 의존하는 정도를 계속 줄여 나가야 한다. 익숙하지 않더라도 극장이나 낚시터운동장 등에서 단합대회를 치르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혼자 여가를 보낼 때도 산과 들에서 등산달리기인라인스케이트 등으로 심신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스스로 길들여 나갈 필요가 있다.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음식을 많이 먹지 않도록 최대한 방어적으로 술을 마셔야 한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실 때는 가급적 물을 많이 마셔 도수를 희석한다. 안주는 될 수 있으면 과일이나 채소류 등 저칼로리 식품을 택한다. 고기 안주와 밥을 함께 먹을 때는 고기보다 밥을 먼저 먹는 것도 방법이다. 뇌에 들어 있는 포만중추는 밥에 많이 들어 있는 탄수화물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술자리 약속은 최소한 3일 이상의 간격을 두도록 하여 간에 부담을 덜어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술자리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끝까지 놓지 않고 절제하려는 자세를 지키는 것이다. 마음만 있으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다.
최윤숙 가톨릭의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