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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일본 “최장 호경기” 곧 선언

밤 벚꽃처럼 소리없이… 58개월째 반짝이는 경제
정부·기업·근로자 군살빼기 후 60년대 ‘이자나기 경기’ 기록 깨
“성장·물가·금리 과열 없는 경제 … 2010년까지 상승세 이어갈 것”

‘리스트라 경기(景氣)’가 일본 경제사를 다시 쓰고 있다. ‘리스트라’란 인력, 설비, 재무의 불필요한 잉여 부분을 잘라내는 리스트럭처링(구조조정)의 일본식 축약어. 리스트라 경기는 경제의 과감한 살빼기 과정에서 일어난 호경기를 뜻한다. 역설적이다.

리스트라 경기는 2002년 2월 시작됐다. 이달로 58개월째를 맞는다. 마이너스 성장으로 잃어버린 10년에 고개 숙였던 일본 경제는 그동안 낮지만 견조한 성장세로 대전환됐다. 58개월 기록은 30여 년간 깨지지 않던 ‘이자나기 경기’를 능가한다. 전후 최장기 호경기 기록을 다시 쓰는 것이다.

‘이자나기’는 일본 열도를 만든 신화 속 신(神)의 이름이다. 1964년 도쿄올림픽 직후 57개월간 이어졌다. 국민들이 자동차(car)·에어컨(cooler)·컬러(color)TV를 구입하면서 煇걋?혁명적으로 바꿔 나간 화려한 경기였다. 그래서 ‘3C 경기’란 닉네임도 붙었다. 고도성장의 최전성기이자 명실상부한 선진국 진입기였다.

역사적 호경기를 뒤엎을 이번 경기는 아직 정식 명칭이 붙지 않았다. ‘리스트라 경기’는 일본 언론이 종종 사용하는 이름이다.

이자나기 경기 당시 근로자 임금은 80% 늘었다. “소득 배가(倍加)”가 정부의 구호였다. 리스트라 경기에선 일본 샐러리맨의 연봉이 매년 1%씩 깎였다. 살벌한 “구조 개혁”이 정부 구호였다. 하지만 현실로 눈을 돌리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

올해 서른두 살 겐지로씨. 작년 말 만났을 때 그는 대기업 사무직 계약사원이었다. 직업의 질은 다르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 3년을 합치면 비정규직만 5년째였다. 그가 얼마 전 낭보를 전해 왔다. “월급은 차이가 없지만 정규직 사원이 됐어요.” 그는 “하는 일도 같다”고 했다. “직장이 안정됐으니 이제 결혼해도 되겠네?”라고 묻자, “사귀고 있다”고 했다. 일본에선 호경기를 반영해 결혼과 출산이 늘고 있다.

겐지로씨는 ‘취업 빙하기’ 세대다. 1998년 대학 졸업 때 취업 상황은 최악이었다. 구할 수 있는 직업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뿐. 일본에서 취업 빙하기가 시작된 것은 ‘거품 경제’ 붕괴 직후부터였다. 1999년엔, 기업이 내놓은 자리는 하나인데 원하는 사람은 둘인 상황까지 몰렸다. 올 들어 드디어 구인이 구직을 넘어섰다. 15년 만이다. 제조업 중심지인 아이치(愛知)현의 경우 구인배율이 1.89까지 치솟았다. 옛날과 반대로 사람 한 명에 자리는 둘(1.89)이란 뜻이다. 거품시대를 능가하는 ‘고용 붐’ 얘기도 있다. 신규 졸업자 숫자가 수요에 못 미치자 기업은 취업 빙하기 때 도태된 ‘중고(中古) 인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본경제신문 다마키 부장은 “예전엔 비정규직을 많이 쓰면 ‘건실하다’ 소리를 들었는데, 요즘엔 ‘부실해서 저런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일본 기업 분위기를 전했다. 도요타자동차 홍보실 이시토야씨에게 묻자 “올해 우리도 비정규직 900명을 정규직으로 돌릴 것”이라고 자랑했다. 작년엔 948명을 정규직으로 돌렸다고 했다.

일본 전체의 비정규직 근로자 역시 줄고 있다. 올해 2분기(4~6월)에 23만 명이나 줄었다. 비정규직이 줄어든 것은 일본 정부가 2002년 3월 근로자의 고용형태를 조사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성장의 봄 기운이 양극화의 그늘로 깊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리스트라 경기의 영웅은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란 인물이다. 게이오(慶應)대 교수를 하던 중 2001년 고이즈미 정권 발족과 함께 내각에 들어왔다가 지난 9월 정권 퇴장과 함께 대학으로 돌아갔다. 경제재정 담당 장관·총무장관 등 여러 자리를 거쳤지만 줄곧 경제 개혁의 사령탑이었다. 다케나카를 보면 리스트라 경기의 실상이 잘 보인다.

그는 성장을 위해 정부를 동원한 일이 없다. 공공사업을 절반으로 줄이고 세출 규모를 삭감한 재정개혁은 사전적으론 오히려 경기를 냉각시키는 일이었다. 대신 히토쓰바시대학 선배 오쿠다 히로시 니혼게이단렌(日本經團連) 회장과 호흡을 맞춰 기업에 돈을 몰아주고 활동 기반을 넓혔다. 4조 엔(31조7700억원)대의 법인세 감세, 제조업의 파견노동 허용, 수도권 규제 완화, 부실 금융사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 일관되게 ‘기업의, 기업을 위한’ 개혁을 실현했다.

파견노동 허가로 비정규직이 300만 명 더 늘어나 ‘양극화의 원흉’ 비난도 들었다. 기업에 천사였던 다케나카는 국민과 관료에겐 혹독한 사령탑이었다.

그동안 일본 기업은 ‘부채’ ‘인력’ ‘설비’ 부문에서 거품경제의 3대 과잉을 털어냈다. 노무라증권 니시자와 애널리스트는 “파견노동 활용을 통해 이루어진 노동력의 효율화가 기업의 잉여자금으로 연결돼 설비투자를 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쉽게 말해 인건비를 줄여 투자 자금을 축적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번 경기회복의 본질은 수출시장을 배경으로 기업이 일으키는 설비투자 덕분이다. 정부와 개인은 역할을 못한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매년 줄어들던 기업의 국내 설비투자는 작년부터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망국병’이라던 기업의 일본 탈출 현상이 진정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전업체 샤프의 미에(三重)현 가메야마(龜山)공장. 일본 ‘제조업 U턴 현상’의 물꼬를 튼 상징적인 곳이다. 샤프가 1000억 엔을 투입해 제1 공장을 준공한 것은 2004년. 일본 정부가 제조업 파견노동을 허용한 직후였다. 직원 45%가 연봉 312만 엔(2500만원 수준)짜리 비정규직 근로자로 채워졌다.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다. 자금을 축적한 샤프는 3500억 엔을 투입해 두 번째 공장을 설립했고 근로자를 4000여 명으로 늘렸다. 샤프 역시 최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 중이다. ‘근로자의 양보?기업의 투자?기업의 자금 축적?기업의 재투자?고용 확대’란 선순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업이 자금을 확보한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한국과 달리 대규모 국내 투자를 재개했다. 왜일까? 지난 9월 도요타자동차 와타나베 사장은 “고이즈미 정부의 구조개혁 노선을 아베 정부도 계승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잉여자금이 설비투자로 연결된 데에는 ‘정부에 대한 믿음’이란 경제심리적 윤활유가 작용했다. 아베 내각에서 다케나카의 자리를 계승한 오타 히로코(大田弘子) 경제재정 담당 장관 역시 ‘작은 정부’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다케나카 라인’이다.


▲ 일본 도쿄의 유명한 쇼핑거리인 오모테산도(表參道)의 대형 쇼핑몰. 가득 메운 쇼핑객들이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AP

이번 ‘구조조정 경기’는 일본의 이전 대형 호경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자나기 경기 이후 1972년부터 23개월간 이어진 ‘열도 개조 경기’는 ‘정부에 의한 경기’였다. 다나카 정부는 ‘국토 균형 발전’이란 명목 아래 낙후된 지방에 돈을 뿌려 경기를 일으켰다. 정치색이 강한 선심 투자였다. 이 후 ‘포퓰리즘’에 가까운 다나카식 경제 운용은 정도만 다를 뿐 고이즈미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반복됐다. 일명 ‘바라마키(마구 뿌려댐) 정치’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800조 엔이 넘는 나랏빚으로 축적돼 있다.

다음 일본의 대형 호경기는 1986년 시작돼 91년 초 참담하게 막을 내린 ‘거품 경기’(51개월)였다. 엔화 강세와 호경기가 겹치면서 기업과 개인에게 흘러들어간 자금이 돌고 돌아 무차별 자산 거품을 일으킨 최악의 ‘투기 경기’였다. 이후 거품 붕괴의 유산을 치유하는 데 일본은 값비싼 장기불황의 대가를 치렀다.

이들과 비교하면 이번 경기는 조용하고 건전한 호황이다. 빚을 동원한 정부 주도도, 자산 거품 속의 투기 주도도 아니다. ‘거품 경기’를 상징하던 도쿄 미나토구 시바우라의 전설적 디스코텍 ‘줄리아나 도쿄’는 중산층 가족들이 찾는 볼링장으로 바뀌어 성업 중이다. 그래서 이번 경기엔 ‘적온(適溫)경제’란 이름이 붙었다.

성장(작년 3.2%), 물가(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0.2%), 금리(콜금리 0.25%)가 일본 경제의 규모에서 매우 적정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히토쓰바시대학 시노하라 명예교수는 이번 경기가 “완만한 굴곡을 거치면서 2010년까지 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경기의 경(硬)착륙을 야기할 ‘과함’이 없기 때문이다.

‘리스트라 경기’의 가장 큰 의미는 ‘인구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성장’이란 점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축소시대의 성장’이다. 일본 인구는 작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노동력 주체인 ‘생산 연령’(15~64세) 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노동력 투입은 경제 성장의 기본 요소다. 기업은 필요한 인력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때 해외로 떠난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돌아오고 있다. 열쇠는 인구 감소로 전체 노동력은 줄어들어도 값 싸고 질 좋은 노동력은 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지금 정규직 전환을 기다리는 비정규 저임금 노동군단이다. 그 수가 1647만 명에 달한다. 겐지로씨의 경우처럼 정규직 전환이 이루어져도 대부분 해고 위험이 사라질 뿐 임금이 급격히 치솟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개인의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일본적인 비정규직 해법이다. 도요타자동차 노동조합 야마구치 국장은 “제조업의 해외 유출을 막고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임금을 억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의 노동조합들이 임금 투쟁인 춘투(春鬪)를 중단하고 임금 동결을 선언한 것은 이번 경기가 시작된 2002년이었다. 이 사실은 그동안 일본 경제의 구성원들이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경제의 성장궤도 재진입과 경쟁력 회복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경주했는지 말해준다.

일본은 더 이상 고임금 경제도, 고물가 경제도 아니다. 올 상반기에만 한국인 100만 명이 일본에 몰려와 돈을 쓰고 돌아갔다. 더 이상 정체된 경제, 폐쇄된 경제도 아니다. 도쿄 도심에서 불과 10분 떨어진 스미다강 동남쪽 임해부도심의 드넓은 땅에는 중국 상하이 푸둥(浦東)을 연상시키는 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수만 명의 한국 청년들이 극심한 구직난을 피해 일본 정보통신 회사의 품에 안기고 있다. 일본 경제는 변했다.

선우정 도쿄특파원 su@chosun.com

입력 : 2006.11.10 22:41 10' / 수정 : 2006.11.10 22:46 24'
http://www.chosun.com/economy/news/200611/2006111004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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