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재단 유일의 동양인 한영우 특임고문
겨울휴가차 고국을 찾은 노벨재단 특임고문 한영우(韓映愚·78) 박사를 17일 만났다. 노벨재단의 유일한 동양인이다. 한국인이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의 하나가 노벨상이다. 물론 평화상 수상자는 나왔지만 문학이나 과학, 혹은 경제학
분야의 수상자가 나오지 않고서는 그 장벽을 훌쩍 뛰어넘었다고 할 수 없다. 그깟 노벨상이 뭔데라는 일부의 시각도 있지만 우리의
콤플렉스는 결국 '제대로 된'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고서야 없어질 것 아닌가? 한 박사에게도 주로 이와 관련된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고은 시인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노벨상 시스템을 알아야 해요. 고은(78)씨가 지난해에도 기다렸다지요.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지난해에는 처음부터 논의 대상이
아니었어요. 그분(고은)은 일단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상을 받고 싶어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노벨재단은
그런 사람 상대 안 합니다. 그분이 요즘처럼 조용히 한 게 2~3년 정도 됐을 겁니다. 내가 직접 만나 수상하고 싶으면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일러주었지요. 본인이 상에 욕심이 있어도 '시에 미쳐 시를 쓰는 것'이라고 말하면 되는데 노벨상 운운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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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우 박사는
스웨덴에서 반평생 살면서 노벨상 수상을 지켜보았다. 그는 “이제는 한국도 노벨평화상 외 문학과
의학·경제·물리·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벨상을 수상하려면 개인의 탁월한 능력도 중요하지만
정부의 지원도 이에 못지않게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서 독창적인 사고를 형성하는
유대인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그런 부분까지 수상에 영향을 미치나요.
"물론입니다. 노벨재단은 수상 후보국의 주요 언론 보도까지 다 분석합니다. 그분이 수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 언론도 호들갑 떨지
말아야 합니다. 노벨상은 대중적으로 나대고 뻐기는 행동을 한 사람에게 우호적이지 않아요."
―노벨문학상의 심사 절차는 어떻게 됩니까.
"문학상은 매년 1월 31일까지 신청을 받습니다. 얼마 전에 끝났지요. 1차로 30명을 후보로 선정합니다. 일주일 동안 서류
심사를 거쳐 15명으로 압축해요. 3차에서 10명, 4차에서 5명, 5차 심사를 거쳐 2명을 최종 후보로 선정하지요. 최종
선정에서는 심사위원 90%가 한명에게 몰표를 줍니다. 고은씨는 지난해에는 1차에도 안 뽑힌 것으로 알아요. 그런데도 우리 언론들은
마치 수상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요란했지요. 그러지 말았으면 합니다."
―솔직히 현재 한국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은 낮은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수상자를 배출하기 위해 조직적인 노력이 있어야 해요. 노벨상 지원위원회 같은 것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수상자 배출과 관련해서는 한국이나 미국 등
국적이 중요하지 않아요. 미국에서 기초과학 분야에 탁월한 한인 과학자들을 영입해서 정부가 지원하는 방법도 괜찮아요. 지난해
김필립(44)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지 못한 것은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도 이유라고 봅니다.
공동 수상 가능성이 충분했어요. 그만큼 정부의 측면 지원이 필요하지요."
―어떤 인재들이 노벨상을 받는다고 보십니까.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창의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방식으로는 힘들다고 봐야겠지요. 비공개 내용인데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유대인들이 20%를 넘어요. 이들은 세계 각지를 떠돌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서 창의력을 가다듬어서라고 해요. 예를
들면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이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민가 재정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독창성이 형성된다네요. 이면에 물론 세계
각국의 실력있는 유대인들의 지원이 한몫을 하겠지요."
"고은 시인은 조용히 있는 게 낫다
賞 받고 싶어하는 모습 보이면 노벨 재단은 우호적이지 않아"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조언을 주신다면요.
"노벨재단과의 관계도 돈독히 해야 하고 노벨상의 선정 배경과 과정 그리고 행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해요. 시상식과
콘서트, 만찬 등 노벨재단이 추진하는 행사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스웨덴과 노벨상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 접근 없이 단지
노벨상만 받겠다는 접근 방식은 문제예요. 노벨의 정신과 혼을 알아야 해요. 보세요, 우리는 이와 관련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도 노벨상 시상식과 만찬 등 일련의 행사들이 방송으로 전파되지 않는 나라는 G20 국가 중 한국 정도일
겁니다. 오죽하면 재단 사람들도 한국이 노벨상에 그리 관심이 없느냐고 물어요. 답답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수상을 두고서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상을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노르웨이 정계에서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을 했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지요. 옥중(獄中)에 있을 때는 노르웨이 정부가 한국 군사정부에 석방을
탄원하기도 했어요. 그는 평화상 후보에도 수차례 올랐었고요. 나도 수상을 위해 노력했지요. 김 전 대통령과는 사상도 다르고 친분이
깊지도 않았지만 한국인이 수상자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한국인을 위해 나서고 로비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지요. 당시 김한정 청와대 부속실장이 나서 DJ 수상 로비를 했다고 하는데 청와대와 외교관들이 나서 로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됐어요. 김 부속실장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해 도운 거지요.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지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니에요. 앞으로도 한국인이 후보에 오르면 나는 열심히 도울겁니다. 한국에서는 내가 DJ 수상을 도와줬다고 나를 빨갱이라고 해요.
저 빨갱이 아닙니다. 그 반대예요. 사실 노벨평화상은 정치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어느 정도 로비도 필요해요.
보세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업적이 있어서 수상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에게 정치 잘하라고 기대하고 주는 것이었지."
―현재 노벨상 후보로 오르내리는 한국인이 있습니까.
"고은씨 외에 한 명이 더 있어요. 아직 실명을 밝힐 단계는 아니고 여성 정치인이라는 것만 말해두지요. 더 이상은 오해를 받을 수
있어 말하기 곤란합니다. 평화상은 정치적인 배경이 많이 작용하는 법이에요."
―스웨덴에서
살면서 가장 보람있는 기억이 있다면 들려주시죠.
"베트남 패망
당시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출하려던 교민들을 탈출시키고 현지에 억류됐던 이대용 전(前) 베트남 공사와 안희완 전 베트남 영사 등
한국 외교관 2명을 구출하는 데 직접 나선 일입니다. 두 사람은 악명 높은 '치화 감옥'에서 5년 동안 지내다가 풀려났지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공산화된 베트남과 이들 석방 문제 해결이 장기화되자 판문점중립국 감독위 소속국인 스웨덴에 지원을 요청했지요. 스웨덴은 공산화한
베트남 정권을 인정한 나라여서 양국 관계가 원만했어요. 박 전 대통령이 대사관을 통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한영우가
레이스 레이스란드(Leisland) 스웨덴 외무성 차관과 가까운 거 알고서 써먹어야 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박 전 대통령은 국가의
명예를 걸고 두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어른 보고 그런 말을 써도 될지 모르지만 그분은 의리의 사나이였어요. 내가 스웨덴
외무차관과 현지로 갔지요. 베트남 쪽에서 인질 석방 대가로 인질 1명당 100만달러씩을 요청했지요. 당시로써는 정말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스웨덴 외무차관이 저에게 '코스트 코스트 나드(kost kost ned)'라고 하더군요. '인질 값이 아니고 그동안
먹여 살린 밥값을 내라'는 스웨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이 제시한 것은 현금이 아닌 현물이었지요. 페니실린과 소염진통제를
각각 100만달러씩 사달라고 요청해 왔어요. 홍콩으로 가서 페니실린과 진통제를 사 보냈지요. 협상은 약 6개월 정도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이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됐어요. 결국 두 사람은 무사히 석방됐지만. 박 전 대통령이 생전에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이 공로로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습니다."
"노벨상 행사 방송 안 하는 나라는 G20 국가 중 한국뿐…
賞 받기만 바라지말고 관심과 지원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공직을 제안받은 적이 있으시죠.
"1963년 카롤린스카(Karolinska) 의대 사회의학 조교수 재직 당시 사회복지특보 제안을 받았지만 고사했어요. 더 없는
영광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 줄 수 있는 방법은 의학분야에 종사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래도 박 전
대통령에게 예를 갖춰 밖에서 한국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 대통령이 제시한 고위직을 거부한 것은 제가 처음이라고
하더라구요. 유재흥 전 스웨덴대사(전 국방장관)가 그말을 해줬지요. 결론은 잘된 듯해요. 박 대통령은 내가 특보직을 고사하니 더
나를 아껴줬지요. 명예보다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동양인이 어떻게 스웨덴의 내각(內閣) 주치의가 될 수 있었습니까?
"의대 지도교수 잉에(Inge) 교수가 저를 당시 사민당 출신 총리 울로프 팔메(Palme)에게 내각 주치의로 추천을 했지요.
그러자 당장 주위에서는 '스웨덴 의사도 많은데 왜 동양인을 내각주치의로 소개하느냐'며 반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잉에 교수는
'스웨덴 사람들은 질투 빼면 쓰러진다'며 '스웨덴식 질투를 잘 이겨내야 한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참 고마운 분이죠. 20년
동안 주치의를 하면서 언론에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았어요. 내가 장수한 비결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웨덴 사람들조차도
질투는 스웨덴을 오늘의 강소국으로 만든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민족성이랄까요? 우리랑 좀 비슷하죠."
―상당히 배타적인 노벨재단에서 한국인이 일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대학 입학하면서 평생 좋은 친구 얀 린스텐(Lindsten)을 만났지요. 이 친구는 유전학 교수가 됐고, 카롤린스카의대
학장·총장·노벨재단 사무총장을 역임했어요. 그와는 여자 외 모든 것을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나를
2001년 노벨재단에 소개했어요. 재단에는 노벨상위원회와 노벨미디어가 있어요. 노벨상위원회는 노벨상을 심사하는 곳이고,
노벨미디어는 국내외 홍보를 하는 곳이지요. 처음에 두 곳 중 어딜 갈지 고민했지요. 하지만 노벨상위원회보다 자유로운 미디어 분야를
택했어요. 머리가 시커먼 사람(한 박사는 동양인을 이렇게 표현)이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지요.
이곳에서는 노벨시상식 콘서트와 전야제, 리셉션 등 온갖 행사를 담당합니다.
노벨상위원회에는 의학·화학·물리학 분야에 각각 50명, 경제 20명, 문학 18명으로 구성돼 있어요. 노벨미디어에는 25명이 재직
중이지요. 재단 소속원들은 영구직입니다. 하지만 멤버가 치매에 걸린 듯하면 서로 '손자나 보러가라'고 말해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 때 은퇴하자는 거지요. 저도 그 소릴 들으면 은퇴할 겁니다. 노벨 유언 중에는 재단사람들은 반드시 청렴한 북유럽 사람만을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예외지요."
한영우 박사는… 6·25전쟁 직후 유학… 20년간 스웨덴 內閣 주치의 지내
한영우 박사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11월 스웨덴 스톡홀롬 유학에 나섰다. 스웨덴의 첫
한국유학생이다. 특이하게도 스웨덴을 유학지로 정한 이유는 1951년 부산서
스웨덴 적십자사 야전병원장 통역관으로 일한 때문이었다. 서울대 의대
재학 중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란 간 그는 영어를 잘해 통역관으로 일했고 이때 병원장 눈에 띈 것이다. 병원장의 추천으로
스톡홀롬행 비행기를 탔다.
동양인에 대한 멸시를 극복하고 하루 20시간씩 지독하게 공부해 1955년 스웨덴 명문대 웁살라대학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 졸업 후
카롤린스카 의대 대학원 석·박사를 마치고 동 대학 조교수가 됐다. 1963년부터 20년 동안 내각주치의를 지냈다.
한 박사는 노벨재단의 유일한 동양인이고 국적은 스웨덴이다. 가족은 한국인 부인과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아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