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위진 회장의 편지는 더 간절했다. 1980년 2월에 보낸 편지의 일부다. “오늘 아침 5시, 당신 꿈을 꾸고 잠에서 깼어요.
당신의 행복, 불행이 나의 것이며, 당신이 계신 곳에 내가 가길 원합니다.
나는 그곳이 죽음의 장소라도 당신을 찾아갈 거예요.” 같은 달에 보낸 다른 연서도 그리움이 절절히 배어났다. “이런 토요일 밤이
되면 너무나 당신이 보고 싶어서. 정신이 없어져요.
오늘 밤 흰 눈이 내리고 있어요. 하루빨리 만나고 싶어요. 외로운 밤엔 몇 시가 되건 당신이 보내준 편지를 반복해 읽으면서 잠이
들어요.”
결혼과 관련된 대목도 눈에 띈다. 황세손은 한 편지에서 “(아내) 줄리아와는 10월까지는 헤어질 것 같아. 하지만 결혼은 올해가
아니야! 진이 내가 있는 테헤란으로 올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둘이 조금 외국에서 방황해 볼까”라고 썼다. 낙선재 문양이 찍힌 종이에 생년월일을 적고 곤명·건명이라고 쓴 메모도 있었다.
곤명·건명은 보통 궁합과 사주팔자 등을 볼 때 쓰는 용어다.
황세손은 낯선 타국에 일하러 가는 연인의 일을 꼼히 챙겨주 ‘기사도(騎士道)’를 발휘하기도 했다. 77년 6월 10일 호주의
한국대사관에 보낸 편지에선 좋은 친구인 스 위진 한 현미술 전시를 위 멜른을 방문한다”며 대에게 배해 달라는
취지의 글을 보냈다.
둘의 소통 도구는 일본어였다. 적당히 려 쓴 황세손의 필치는 유려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한에 서툴렀. 그러나 사랑
고백만은 ‘고국 말’로 하길 원했 다. 이란 때로 추되는 연도가 알려지 않는 어느 8월의 편지.
그 “진에 한국어로 ‘사랑해’ 고 하 느낌 와 닿을 ’이라 한글 ‘보고 싶어. 말 신이 정말
보고 싶어요’라고 썼다. 그 한 문장을 위해 연습을 했을 것이다. 다른 선 한글 거의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세손과 여인은 그렇게 열렬한 사랑을 나눴다.
j 칵테일 >> 유위진 회장 … 황세손이 설계한 내 집, 한 곳도 손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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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근 기자] |
서울 청운동 89의 107번지, 고(故) 유위진 회장이 30년을 살다 떠난 빨간 대 2층 양옥집은 황세손이 직접 설계한 사랑의
보금자리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혼신을 기울여 설계한 황세손의 진심이 느껴져서일까.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집 구조가 요즘 건축물에 뒤지지
않는다.
집주인이 하늘나라로 떠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고인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실내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정겹다.
황세손과 국제전화를 나누었을 구식 전화기, 함께 보고 이야기했을 일본어판 화집, 작은 탁자 위에 놓인 해묵은 화장품 모 오래전
두 사람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일종의 유물이다.
황세손의 설계를 존중했던 유 회장은 생전에 집 구석석을 쓸고 닦으며 작은 모서리 하나 고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