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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악우회' 대연주회장(황금 홀)에서의 비너 필하모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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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악우회'를 설명하는 김에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대하여도 설명코자 한다. 우리는 보통 빈 필, 또는 비엔나
필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이름은 '비너 필하모니커 오케스트라'이며 단축하여서 비너 필하모니커(Wiener Philharmoniker)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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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비너 필하모닉(Wien Philarmonik: Vienna Philarmonic)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렇게 부르던
저렇게 부르던 하나의 같은 단체이다. 하지만 '빈 필'이라고 짧게 부르는 것은 우리로서는 알아 듣는 일이지만 정작 비엔나
사람들에게는 어색한 말이다. 본 블로그에서는 편의상 비너 필하모니커라고 부르기로 한다. 비너 필하모니커는 대단한 오케스트라이다.
자꾸 말하면 잔소리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비너 필하모니커에 대한 각종 찬사는 생략키로 하고 다만 몇 사람의 코멘트만 소개코자
한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비너 필하모니커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 말했다. 안톤 브루크너는 "가장 우수한 음악단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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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말러는 "음악 예술과 인간의 유대를 맺어주는 단체"라고 평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런 저런 코멘트를
종합하여서 "아무리 찬사를 해도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이 정도면 비너 필하모니커가 얼마나 대단한 오케스트라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비너 필하모니커'는 무려 160 여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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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악우회' 황금 홀의 여신상. '비너 필하모니커'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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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비너 필하모니커인데 단원이 되려면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하는가? 간단하다. 비너 슈타츠오퍼(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비너 필하모니커의 단원으로 응모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적어도 3년 이상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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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각해 보라! 비너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의 멤버가 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저나 비너 필하모니커와 비너 슈타츠오퍼가 상호 보완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항이다. 그런데 비너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는 무슨 속셈인지 외국인은 거의 뽑지 않는다. 예전에는 여성도 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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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지금은 워낙 남녀평등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여성단원도 간혹 눈에 띠게 되었지만 오스트리아 사람만 뽑는다는 것은
아직도 일종의 관례처럼 되어 있다. 단, 독일인은 크게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와서는 외국인도 단원으로
고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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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스트리아만의 인적자원이 부족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가만히 보니까 외국인, 특히 동양인의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깊이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외국인은 안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비엔나 특유의 오페레타를
연주한다든지, 또는 신년음악회에서 처럼 슈트라우스의 왈츠나 폴카의 연주는 오스트리아 토박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비엔나에서
자라고 공부하고 생활하는 비엔나 토박이가 가장 제대로 표현할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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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우리도 마찬가지여서 외국인이 아무리 가야금을 잘 뜯고 피리를 잘 분다고 해도 된장과 김치로 무장한 토속 한국인만큼 한국적인 속내를 표현할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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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빈 메타 지휘의 비엔나 신년음악회. 언제나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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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 필하모니커의 연혁에 대하여는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1842년에 결성되어 첫 연주를 했다. 3월 28일이었다. 오페라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로서 유명한 작곡가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 1810-1849)가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호프부르크의 레도우텐잘(Redoutensaal)에서 그랜드 콘서트를 연 것이 효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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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니콜라이는 독일 쾨니히스버그 출신으로
1841년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극장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부임한 양반이다. 그는 1830년부터 궁정오페라극장(현 슈타츠오퍼)의
지휘자로 있던 프란츠 라흐너(Franz Lachner: 1803-1890)와 친분이 있었다. 라흐너는 궁정오페라극장에서 발레를
공연하는 중에 막간에 베토벤의 교향곡을 지휘하여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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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너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몇년후 예술가연맹(Künstler-Verein)을
조직하여 연위주의 활을 펼쳤다. 이것이 아마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일반 오케스트라의 시초가 아닌가 싶다. 예술가연맹이라는
오케스트라는 얼마후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서 해체되었지만 라흐너의 아이디어는 친구인 오토 니콜라이에게 전수되었고 니콜라이는 이윽고
1842년 궁정오페라극장의 오케스트라 멤버들을 활용하여 그랜드 콘서트를 열었던 것이다. 니콜라이는 새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필하모닉 아카데미'라고 불렀다. '음악애호'라는 의미의 필하모닉이라는 용어도 그때 비로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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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라흐너. 비엔나에 상설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필하모닉 아카데미'를 창설한 오토 니콜라이는 1847년 비엔나를 떠나 독일로 영원히 돌아갔다. 니콜라이가 없는 '필하모닉
아카데미'는 지도자를 잃고 창파의 일엽편주처럼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로부터 무려 12년 동안 '필하모닉 아카데미'는 별다른
활동도 하지 못한채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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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둠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는 말처럼 1860년대에 들어서 사회가
어정도 안정이 되자 일반 시민의 음악회에 대한 열망도 높아졌다. 연주회를 개최하여 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페라
지휘자인 칼 에커르트(Carl Eckert)가 '필하모닉 아카데미'의 멤버들을 다시 추스려서 캐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순수한
연주회만을 위한 연주회를 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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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로부터 '필하모닉 아카데미'는 상임지휘자 이외에 저명한 여러 지휘자들을 초빙하여
연주회를 갖기로 했다. 명칭도 '비너 필하모니커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참고로 지금까지의 상임지휘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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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 필하모니커'의 창설자인 작곡가 겸 지휘자 오토 니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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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보아도 여성은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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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데소프(Otto Dessoff)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수 없다. 오토 데소프의 시기에 '비너 필하모니커'의 레퍼토리는 대단히
폭이 넓어졌다. 바로크는 물론이고 이른바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것에 도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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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때에 새로 건축한 '비엔나
악우회' 건물로 이전하여 대연주회장(황금 홀)에서 기쁨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대연주회장은 음향이 뛰어났다. '비너 필하모니커'의
스타일과 음향도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비너 필하모니커'의 발전을 위한 한스 리히터의 공로는 잊을수 없다.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로 말하자면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3부작의 초연을 모두 지휘한바 있는 전설적인
지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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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비너 필하모니커'의 지휘자가 되면서부터 '비너 필하모니커'는 세계적인 위상을 갖게 되었다. 리히터의 시기에
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과 제3번,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8번이 '황금 홀'에서 세계 초연되었다. 리히터의 열정과 업적은 자세히
나열하기가 어렵고 다만 한마디만 붙인다면 리히터의 시기를 '비너 필하모니커'의 '황금 시기'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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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해인가 얼마전의 신년음악회를 보니 여성연주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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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 필하모니커'는 1900년에 처음으로 외국연주회를 가졌다. 파리의 만국박람회에 오스트리아를 대표하여서 참가하여 연주회를 가진
것이다. 거장 구스타브 말러가 지휘했다. 1908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비너 필하모니커'를 공식 단체로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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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 필하모니커'의 명성을 날이 갈수록 드높아졌다. 1908년 펠릭스 폰 봐인가르트너가 지휘자로 부임한 이후 여러번에 걸친 해외연주회를
가졌으며 1922년에는 저 멀리 남미까지 가서 연주회를 가졌으니 대단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상임 지휘자가 된
일은 없으나 수시로 '비너 필하모니커'를 지휘하여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었다. 1933년에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지휘자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초빙지휘자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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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니니는 1937년까지 '비너 필하모니커'와 깊은 인연을 맺고 연주회를 지휘했으며
슈타츠오퍼에서 오페라도 지휘하였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한 시즌에 한 명의 객원지휘자를 모신다는 관례를 깨고 1933년부터
1945년까지, 그리고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비너 필하모니커'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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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필하모니커를 유지해온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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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트뱅글러가 지휘자로 있을 때인 1938년, '비너 필하모니커'는 가장 어려 시 경험하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는
슈타츠오퍼에 속하여 있는 모든 유태인들을 추방하였고 울러 '비너 필하모니커'를 일시적으로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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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의 유태인 추방 명령을 백지하기 위해 부단 을 기울으 과 반쪽 유태인인 멤버들을 구제하였고 아 추방되거나
처형당할 운명의 상당수 멤버들을 구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너 필하모니커'의 버 6명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으며 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은 안가겠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동부전선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전쟁후 '비너 필하모니커'는 이들을 깊이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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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손끝으로 음을 창조하는 허버트 폰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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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전쟁이 끝났자 '비너 필하모니커'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33년부터 관례로 지켜온 초빙지휘자 시스템을 계속
살려나갔다. 두 사람의 초빙지휘자가 특별히 '비너 필하모니커'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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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칼 뵘(Karl
Boehm)과 독일 출신의 허버트 폰 카라얀이었다. 그리고 '비너 필하모니커' 명예회원인 레오나드 번슈타인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휘봉을 잡았다. 그동안 '비너 필하모니커'가 취입한 음반-CD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DDG 라벨로 나온 것만해도 부지기수였다.
'비너 필하모니커'는 매년 비엔나신년음악회의 연주를 맡았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해외순회연주는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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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해석의 최고 권위자인 칼 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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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daum.net/johnkchung/682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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