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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작곡가 비발디는
1678년 베네치아 상 마르코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큰 지진에 놀라는
바람에 칠삭둥이로 태어났다는 그는 어 릴 때부터 시름시름 앓으면서 간신히 성장했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3대 음악 명문 중 한
집 안 출신답게 비발디는 소년 시절부터 바이올린 지도를 아버지에게 충분히 받았고, 이것이 나중에 그가 바이올린의 대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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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때 삭발하고 하급 성직자가 된 비발디는 25세
때 서품을 받아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 고 그해 9월 베네치아의 피에타 여자 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했다. 이 양육원은
여자 고 아들만 모아 키우는 일종의 고아원으로 특히 음악 교육에 중점을 두던 곳이었다. 비발디는 이곳 에서 실기 지도는 물론
원생들로 구성된 피에타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아 했으며, 그들을 위해 여 러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비발디의 음악이 대체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소 나약하다는 평을 듣 는 이유가 이 당시 여자아이들을 위해 쓴 곡이 많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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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작곡 방법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을 듣는 그는 79개의 바이올린 협주 곡, 18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12개의 첼로를 위한 3중주곡 등 수많은 곡을 썼다. 뿐만
아니라 38 개의 오페라와 미사곡, 모데토, 오라토리오 등 교회를 위한 종교 음악도 많이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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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약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창작 활동을 한
비발디는 자신이 명바이올리니스트였던만 큼 독특하면서 화려한 기교가 담긴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만들었고, 이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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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페라의 흥행 사업에 손을 대고, 여가수 안나
지로와 염문을 뿌리는 등 그가 사제로서 의 의무를 충실히 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자만심이 강하고 낭비벽이
심했 던 그의 성격도 갖가지 일화를 남겼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빈축을 사 고향에서 쫓겨나다 시피 한 그는 각지를
전전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객사해 그곳의 빈민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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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는 바이올린의 명수로서 전 유럽에 이름을
날렸으며, 생전에는 작곡가로서보다 바이올리 니스트로서 더욱 유명했다. 비발디 자신은 작곡가로서 더욱 알려지기를 바랐다고 하지만,
당시 골도니라는 비평가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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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영점이다." 비발디는 워낙 작품을 많이 썼으므로 사실 비슷비슷하게 들리는 곡들이 여러 곡 있기는 하다.
훗날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그에 대해 '똑같은 곡을 100곡이나 쓴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크
음악의 대들보라고 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7세 연상인 비발 디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현악 합주곡 몇 곡을 건반 악기용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크 음악 연구와 감상이 활발해진 오늘날 비발디는 코렐리, 바흐, 헨델의 음악을 감상하는데 있어 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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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www.musicschool.pe.kr/musician/vivald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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