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dhaikovsky, Pyotr ll'yich (1840.5.7~1893.11.6)

어느 나라 하고 그 족만이 향유한 특징있는 음악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흔히 민족음 같이 해석 될 수 있고, 민족의식을 명히 하는 국민음악, 다시 말하면 국민주의적 음악을 말할때도있다. 국민주의는 보통 19세기 자본주의융성기의 민족국가 형성의 움직임에 관련된 것을 말하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해방의 독립운동에 관련된 것을 민족주의라 한다.
러시아 민족은 예로부터 대단히 우수한 민요를 풍부히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즐겨한다는 기록이 있다. 러시아 민족의 특성은 한 곡에도 조바꿈의 변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하모니도 풍부하여 다른 민족에게서 찾을 수 없 특별한 것이 재해 있다는 것이. 러시아 민요는 몽고의 영향과 그리스정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민족음악을 발전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광산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의 총감독이었으며 그의 가족관계로는 위로 이복누이와 형 또 아래에 누이동생과 동생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유년 시대를 보냈다. 그는 어려서 가정교사에게 불어와 독어를 배웠는데 그는 그녀를 잘 이해하고 따라서 그녀와의 이별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이별의 충격은 페테르스부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사 생활에서 더욱 견딜 수 없게 하였고 그래서 그는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성애에 빠지게 된다,
1848(?)년 콜레라로 어머니가 죽은 뒤 작곡을 시작하였고 감정의 배출구로 음악을 쓰는 습관이 몸에 붙이게 되었다. 1855년 그는 피아노 교사 루돌프 퀸딩거에게 레슨은 받기 시작하였다. 1863년 그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859년 이후 그는 법무성에서 근무하는 한편 음악공부도 하는 이중생활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상 특히 페테레스부르크의 밀리 발라게레프를 둘러싼 인물들이 보급시키고 있던 국민주의 음악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만나 그의 최초의 교향곡 G단조의 작품을 쓰는 일에 착수했다, 이 <겨울날의 환상>은 부제에서 나타났듯이 로맨틱한 기분을 암시하며 4악장 중 3개의 악장에 민족적인 주제를 쓰고 있지만 이 때문에 교향곡에 자전적인 요소가 손상되고 있지는 않다.
그는 1867년 <폭풍우>를 작곡했을 때 베를리오즈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다음해에 발라키레프와 그의 일파들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무소그르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있었다. 발라키레프는 젊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환상곡을 비판하였으며 관현악작품인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에>의 형성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는 발라키레프 일파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냈는데 그 까닭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과 개정에 발라키레프가 도움을 주기는 했어도 차이코프스키는 발라키레프의 페테르스부르크의 문하생과는 달리 음악원에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음악가였으며 그의 제 1 교향곡에서 이미 명백해진 바 와 같이 그의 작품은 서구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러시아 민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고 그래서 현악사중주1번의 느린 악장에 우크라이나 노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는 열렬한 국민주의자는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선율들은 C단조의 제2교향곡에서도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op.17인 이 작품은<소러시아>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1874~1878년 사이에 차이코프스키 생애에 가장 많은 걸작이 나온다. 이때 그는 동성연애자로서의 죄악감에 더욱 시달리게 된 그는 자기가 위기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자 결혼만이 자기 문제의 해결방도 인양 다짜고짜 결혼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역점과 비극적인 억압감을 그는 오로지 음악에만 쏟아 넣었던 것이다.
Bb단조의 제 1피아노 협주곡 op.23은 어느 정도 감정이 동요하고 있던 시기와 국민주의 적인 시기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국민주의 적 면은 양쪽 끝악장에 우크라이나 주제를 다시 쓰고 있는것에 나타나 있다.
그는 폰 메크 부인과 교재한 후 약 10년간 집에 틀어 박힌 생활을 했다. 작곡을 하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고 휴가 때에는 서유럽에 가서 장기간 체재하면서 작곡가들을 방문한다던가 새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메크 부인과 관계가 끊어진 다음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콜레라에 전염 되었다는 것이 그의 사인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도 많은 그의 전기에서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문화성에서는 면밀한 고증을 통해 그의 죽음이 독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를 탐닉하고 있다는 설이 점점 퍼지자 법률학교 시절의 동급생이었던 법관들은 그 스캔들이 자신들에게 파급될 것을 우려하여 그에게 스스로 독배를 마시도록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1863년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루빈스타인이 세운 음��원에 입학하여 루빈-스타인에게 악기법과 작곡을 정식으로 공부하게 된다. 그는 이 음악원 시절에 중요한 친구 게르만 라로슈를 알게되고 졸업 후 루빈스타인의 동생 N.루빈스타인이 원장이 된 새로 창설된 모스크바 음악원에 강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10년간 그 직에 있으면서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의 재능이 높이 평가되고 있을 때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카시킨, 알브레히트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68년 교향곡 1����� 겨울날의 환상을 N.루빈스타인의 지휘로 모스크바에서 연주되었을 때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같은해의 최초의 오페라 <지방 장관>을 공연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해 발라키레프와 그의 그룹들과도 친교를 맺는다. 그리하여 1872년 교향시풍인 <로미오와 줄리엣> 서������� �����������여 ��라키레프에게 바쳤다. 1871년 현악4중주제 1번을 그리고 1872년 교향곡 2번을 썼는데 이는 민요를 테마로 한 국민주위 적 작품이다. 1873년에는 교향곡 환상곡<템페스트>를 작곡������ 5인조의 이론적 지��자 ���������������������소�����에게 바쳤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국���악파와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후 그의 작곡 경향은 점차 멀어져 서유럽파로 끌렸던 것이다.
낭만주의 후기에 러시아 음악: 페테����스부르크 ��파, 모스크���악파, 5인조�������� 불리는 신 루빈스타인파로 구별할수 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가장 큰 ������������������ ��� 악파로 볼 수 있�� 루빈����������스타��� ���는 안톤 루빈스타인이 대표자로 그는 피아니스트 �� 작곡가로서 유럽 각지를 여행하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쳤으며, 러시아의 교향악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
1862 년 페테르스부르크에 음악원을 창설하였다.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은 안톤의 동생으로 ������아니�����트 겸 작곡가로 이름이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형제�� 러시아의 피���니즘을 확립시키고 서유럽적���� 기법의 보급에 진력하였다.
Source: http://www.musicschool.pe.kr/musician/tscaikovsky.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