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umann, Robert (1810.6.8~1856.7.29)

슈만이야말로 낭만주의를 충분히 꽃피우는 데 누구보다 공이 큰 작곡가였다. 어느 때인가 한 비평가가 "왜 당신은 정통 소나타를 쓰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니 슈만은 격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사상이든 이미 형성되어 있는 형식에 꼭 들어맞아야 한다는 말이오? 모든 예술작품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의의와 형식이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내용 과 사상이 형식을 결정할뿐 그 역(逆)은 아니오!"
그의 주장은 분명 낭만주의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슈만도 '피아노 소나타'라고 이름 붙은 곡을 세 곡 썼지만 환상적이고 정열에 넘쳐 종래의 소나 타 관념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슈만은 소나타나 교향곡 등의 거창한 구성 을 가진 곡에서 진가를 발휘하기보다 피아노 소품이나 가곡 등에서 타고난 천재 성과 낭만성을 발휘했다. 교향곡은 클라라와 결혼한 후 아내의 끈질긴 권유를 받고서야 겨우 손을 댄 분야이니 슈만의 행보의 주축이 어디에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슈만의 부계에는 유전적인 정신적 질환이 있었던 듯 아버지가 정신병으로 사 망한 데 이어 누이도 19세 때 자살했으며 슈만 역시 최후를 정신병원에서 맞이 했다. 그를 몹시도 괴롭혔던 환청, 환각, 망상 등의 이상체질과 격정에 빠지기 쉬운 과민한 기질이 오히려 변화와 다양성, 때로는 역설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 주의적 예술 표현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도대체가 낭 만주의란 그다지 건강한 이즘(ism)인 것 같지는 않다.
독일의 츠비카우라는 곳에서 서점을 경영하는 아우그스트와 외과의사의 딸 요 한나 사이에서 슈만은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음악은 8세부터 배웠고 9세 부터 작곡을 했으며 14세에는 꽤 솜씨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집이 서점이 었던 덕에 어릴 때부터 독서를 풍부하게 해 그가 후에 문필가로도 일기를 이루 는 바탕이 되었다. 대체로 낭만주의 시대에는 예술가란 다방면의 재능을 과시하 려는 경향이 농후했기에 작곡가들 중에도 다예다능한 사람이 많았다.
본격적인 음악 훈련은 20세 때인 1830년부터 피아노 교사 비크에게 받기 시작 했다. 그것이 9세나 연하인 비크의 딸 클라라와의 음악사상 가장 열렬했다고 평 가되는 연애의 계기가 되었다. 무일푼에 장래성도 불투명한데다 성격마저 격한 슈만이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 소질을 갖고 있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을 달라고 하자, 스승 비크는 맹렬히 반대하고 나서 급기야 소송사태까지 번졌다. 슈만의 승소로 두 사람은 어느 시골의 자그마한 교회에서 그들만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나이는 이미 30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길고 긴 열애 끝에 결혼한 부부는 사랑의 승리를 구가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슈만의 나이 43세 무렵부터 그들 부부 위에 큰 불행의 그림 자가 드리웠다. 어찌 된 일인지 슈만은 언어 표현력이 떨어지더니 동작이 느려 지고 때때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오케스트라나 코러스 단원들과 불화가 잦아졌다. 병세는 갈수록 심해져 다음해에는 라인 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기까 지 했다. 1855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다소 회복될 기미를 보였으나 곧 다시 악화되어 1956년 6월 회화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필력이 탁월했던 슈만은 23세 때 '음악신보'라는 평론지를 창간했다. 플로 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두 가지 필명으로 날카로운 음악 평론을 펴면서 그 는 새로운 음악가들을 발굴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청년 쇼팽, 브람스 등을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한 것도 그였다.
초심자들은 처음부터 슈만의 어려운 곡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피아노 곡이 원곡인 <트로이메라이>, 조금 나아가 가곡 <여자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 랑>등부터 듣다보면 슈만의 음악 세계로 보다 용이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Source: http://www.musicschool.pe.kr/musician/schuman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