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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악은 길 위에서 만들어졌다. 35년을 산 모차르트의 연보만 보아도 거의 매년 연주와 작곡 여행을
떠났다. 1762년 1월 7일은 모차르트가 가족과 함께 뮌헨으로 첫 연주여행을 한 날이다. 신동의
등장으로 뮌헨은 열광했고, 같은 해 10월 6일 모차르트 가족은 빈에 머물면서 쇤브룬 궁에서
어전 연주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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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년 음악 신동으로 유럽을 놀라게 한 9살의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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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 모차르트가
궁전에서 넘어졌을 때,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준 공주가 있었다. 모차르트는 나중에 커서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당시 동갑내기이던 공주는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그의 성품으로 보아 더한 말도 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이여행을
시발점으로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를 비롯해 전 유럽을 돌아다녔다. 여행
시기를 중심으로 그의 음악을 설명할 수도 있다. 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와
프라하를 무척 사랑했다. 그에게 여행은 음악가로서 완성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대위법을 비롯한 음악 공부를 하고, 위대한 선배 작곡가들을 접하고, 여행을 하는 길 위에서도
작곡을 했다. 그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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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적어도 예술이나 과학을 하는 사람은 여행을 하지 않으면 비참해지거든요. 또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만일 대주교가 저에게 2년마다 여행을 허락하지 않으면 저는 어떤 자리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여행을 하든 하지 않든 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해도 신성 모독은 아니라고 봅니다-은 늘 같은
곳에만 머물면 나빠집니다.” 공자도,
부처도, 예수도 모두 길 위의 사람이었다. 거기에 모차르트를 더한다면 신성 모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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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필자인 나에게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라고 했다. 간헐적으로 우울해하는 나를 잘 아는 오래된 친구의 말이다.
나는 듣고 있던
차이콥스키(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를 듣고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의 음반을 치우고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 음악
음반을 잘 닦아서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어떤 수사나 찬사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를 천재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는 음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수사는 그의 음악에 비하면 먼지와 같이 가볍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을 일체 거부했다. 이유는 ‘그를 할
뿐’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인생에 대해서 쓴다는 건, 쩌면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 시 예수처럼 ‘사람’으로 태어났다. |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서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아들로 태어났다. ‘요하네스
크리스토스토모스 볼프강 고트리프 모차르트’가 이 아들의 정식 이름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마데우스라는 두 번째 이름은 ‘신의 은총’이라는 뜻으로 독일식 이름인 고트리프를 라틴어로
바꾼 것이다. 모차르트는 생전에 라틴식인 아마데우스 대신 프랑스식인 아마데를 즐겨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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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의 아름다운 청년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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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레오폴트는 다섯 아이를 유아기에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이 시기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형제들의
떼죽음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일곱 번째
아들인 모차르트가 무사히 유아기를 넘긴 것만으로도 이들 부부에게는 축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모차르트의 누나 역시 유아기를 무사히 넘겼다. 게다가
이 사내아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다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1761년 1월 26일 저녁 9시
30분, 미뉴에트와 트리오를 30분 만에 다 익혔다”라고 놀라움에 겨워 일기를 쓰게 했다.
이렇게 귀한 아들의 존재는 하이든같이 위대한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아버지의 한을 풀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 부자 사이에는 애증의 그림자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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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를 이야기할 때,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떼어놓으면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이 천재 아들은 아버지의 자랑이기도 했지만, 집안의 재산이기도 했다. 여섯 살 때부터
이어진 연주 여행을 다녀오면 은행 잔고가 두둑이 쌓였다. 심지어 아버지는 아들이 성장한 후에는
육체적으로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마저도 두려워했다. 그가 결혼하는 것조차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모차르트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사랑을
찾아다녔다.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음악으로 사랑을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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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음악을 한마디로 감히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인간의 육체를 음률로
만들어 귀로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듣게 한다. ‘느낀다’라고 표현하는 건
부적절하다. 피아노 소품부터 실내악, 협주곡, 교향곡,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음악의 모든 장르를 통틀어, 각 분야의 전문가마저도 감탄시키는 그의 음악적 경지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현악사중주에 어떤 곡이 있다든지, ‘마술피리’ 같은 오페라
한가지로 모차르트를 설명하기엔 너무 빈약하다. 대주교의 요청을 받고 작곡한 미사곡까지
모차르트의 손을 거치면 선율이 생생한 생명력으로 요동치면서 특별한 음악, 즉 모차르트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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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천재성에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과연 아들이 오래 살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1778년
2월 16일 레오폴트가 아들 모차르트에게 보낸 편지를 본다. “어린
시절 너는 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른스러웠으며, 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거나 음악감상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아무도 너에게 농담조차 걸 수 없었다. 심지어 너무나 엄숙한 네 연주와
일찍 개화한 네 재능, 생각에 잠긴 진지한 네 작은 얼굴을 지켜본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네가 오래 살 수 있을지 걱정했다.” 이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모차르트는 35년을 살았다. 하지만 이 인생은 350년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음악 인생이었다. 짧다면 짧은 그의 삶에 음악 목록이 풍부한 이유는 우리로 치면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한 작곡 덕분이다. 이 천재는 후반생인 10년간 걸작을 쏟아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를 비롯해 ‘주피터 교향곡’, 미완성으로 끝난 레퀴엠에 이르기까지
모차르트는 죽어가는 순간지도 악보 위에 모든 걸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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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내로 맞은 콘스탄체의 초상화(18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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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당대의 음악가들에게는 주인이 있었다. 예술가들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져 있어서 후원자 없이는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는 2명의 후원자를 섬겼는데, 첫 번째는 슈라덴바흐의 백작
지기스문트였다. 음악 애호가인 그는 열정적으로 모차르트를 지원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 대주교가
사망하고, 콜로레도 백작 히에로니무스 대주교가 후원자가 되자 관계가 악화되었다. 하지만 이
일은 모차르트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는 헨델 이후 공식적인 후원 없이 자립을 감행한 최초의 작곡가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고
황제 요제프 2세가 모차르트를 궁정 작곡가로 임명했는데, 이 때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을 작곡해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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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평생 반려자인 콘스탄체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아버지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782년 8월 4일에 성 슈테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콘스탄체는
오래 살아 사진까지 몇 장 남겼다. 그녀는 남편의 명성을 아주 잘 누리고 살았다. 그래서
그녀를 악처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애정은 각별했다. 부부의 일은 두 사람만이 아는
법이므로 이런저런 평가는 별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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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명성에 걸맞게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돈을 빌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유는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은, 즉 과소비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당구, 고급 옷, 파이프
담배, 여행 등으로 그는 인생을 즐겼다. 당시 빈의 상류층은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
시민주의적, 인도주의적 우애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 단체인 프리메이슨 단원이 많았다.
모차르트 역시 1784년 12월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 이미 도시에 크고 작은 8개의 지부가
있었으니, 당대 프리메이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모차르트 지지자들인 귀족들도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도제로 입문하여 미숙련 장인으로 승급하고, 숙련 장인인
메이슨의 지위에 올랐다. 천방지축이긴
했지만 모차르트는 매우 성실하게 모임에 참석해 노래, 칸타타, 장례 음악 등을 작곡했다. 이후
그의 음악에 프리메이슨의 정신이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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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성공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오페라 ‘마술피리’ 역시 마찬가지다. 모차르트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 결사 단체를 알지 못하면 그의 음악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를 프리메이슨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그의 작곡 기록부에 기록된 마지막
작품은 ‘작은 프리메이슨 칸타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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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여름, 모차르트를 찾은 한 방문객이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한. 익명의 후원자가 신분을 감춘
채 비밀스럽게 제안한 것이다. 그런 그해 겨울 모르트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죽어가는
뮤즈에게 장송곡인 ‘레퀴엠’을 의뢰다니… 매우 시적이고 드라틱 일 차르트의 삶을
욱 신비롭게 만든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던 궁정 음악가 살리에르가
그의 재능을 질투하여 일이라는 설도 있지만 사실은 매우 썰렁하다. 발제크 백작이 아
음 도하기 위해 레퀴엠 작곡을 의뢰한 는데, 그 작곡가들에게 뢰한 작품을 마치
자신이 작곡한 것처럼 위장해 개인 연주회에서 연주한 무뢰이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시신이
동묘지에 던져진 것도 당 황제가 장례 절차를 간소화하라는 칙령에 의한 것이었을 뿐 그리
비참한 최후는 아니었다. 다만 대천재의 장례치고는 어딘지 부한 것 같았다. 오히려 고흐나
고, 바르톡 같은 예술가를 생하면 모차르트 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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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심한 류머티즘 열 때문에 죽었다. 1791년 11월 20일 모차르 팔다가 자주 구토를
하면서 자리보전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보름 후 뮤즈는 지상을 떠나 천상의 세계로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드라마틱한 오페라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과도 같았다. 알잖은가. 아무리 아름다운
공연도 막이 내려가면 적멸의 고요함이 다가온는 것을. 르트라 음악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 후로 살아남은 자들의 과 마 그의 음악이 깃들었으니 나는 모차르트를
죽었다고 하지 않는다. 천상의 존재였던 그가 잠시 지상 다녀갔다고 말하고 싶다. 소풍을
나온 아이럼 말이다. 다시 턴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모차르트 음반을 쭉 살펴본다.
어떤 음반을 올려놓을까 생각하다 그냥 눈을 감고 아무 음반이나 집어 들었다. 어떤 곡일까
궁금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다 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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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음악은 언제나 찬란한 기쁨이다!>(피터 게이 저, 푸른숲) “천재성의
낭만적인 유혹을 걷어낸 가장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평전”이라는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서평을
받은 책이다. 천재, 아들, 종, 자유음악가, 거지, 거장, 극작가, 고전의 총 8개 장으로 구성해 그의
음악과 인간 모차르트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정영목의 유려한 번역도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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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평전-나는 다만 나, 곧 음악일 뿐이다>(필립 솔레르스 저, 효형출판)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편집장이 아마 읽으면 실망 할 거라고 하면서
보내준 책이다. 이유는 평전이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깝다는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속으로
‘잘됐네’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딱딱한 평전보다는 부드러운 이야기책이라고 하고 싶다.
모차르트에 정통한 지식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모차르트에게 바치는
연서라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모차르트를 이 정도로 이해하고 글로 써내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애정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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