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피아노 연주 상의 명기주의의 완성과 표제 음악의 확립이라는 음악 사상 매우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작품은 편곡까지 포함해 방대한 수에 이르며 악종도 다양한데, 그 중심은 피아노곡과 교향시다. |
본명 : 리스트 페렌츠 (Liszt Ferenc) |
국적 : 헝가리 |
출생지 : 헝가리 라이딩 |
주요작품 : 《헝가리 광시곡》《순례의 해》 |
↑ 프란츠 리스트 박물관 : 독일 바이에른주 바이로이트 소재. |
1811년 헝가리의 라이딩에서 에스텔하지
후작의 토지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츠
리스트는 독일식 이름이고, 헝가리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Liszt Ferenc)이다. 6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820년 프레스부르크에서 독주회를
가져 천재의 출현이라는 평을 받았다. 1823년 빈으로 가서 K.체르니에게 사사하면서 A.살리에리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다시 파리로 가서 파에르와 라이하로부터 화성(和聲)을 배웠다. 다음 해 파리에서 데뷔하여 프랑스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였고, 런던에서도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827년 여행길에서 부친을 여의고 수년 동안은 고난의 시기였으나, 그동안에 체험한 7월 혁명(1830), 여제자 카롤린과의 사랑, 페티스, 쇼팽, 베를리오즈, 파가니니 등과의 교제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특히 파가니니와의 접촉으로 그의 연주는 종래 체르니의 스타일로부터 명기주의(名技主義)의 스타일로 전환하였다. 그 후 교향시 창조의 기반이 되는 문학적 교양을 쌓고, 6세 연상인 다구 백작부인도 이 무렵에 알게 되었다. 1835년 리스트와 부인은 제네바로 가서 동거생활에 들어가, 두 사람 사이에서 브랑딘, 코지마, 다니엘 등 세 아이가 태어났는데, 코지마는 후에 바그너의 부인이 되었다. 1838년 빈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 일대를 무대로 한 연주여행을 하였으며, 이것은 그가 바이마르에 정주(定住)한 1847년까지 계속되었다. 1847년 키예프에서 연주여행을 하던 중에 카롤리네 자인 비트겐슈타인 (Carolyne zu Sayn-Wittgenstein)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카롤리네는 러시아의 공주로 니콜라스공과 결혼하였으나 파경에 이른 뒤였다. 카롤리네는 리스트와 결혼하기 위하여 이혼하려고 하였으나 교황청에서 허락하지 않자, 두 사람은 바이마르에 정착하여 동거하였다. 리스트는 작곡에만 전념하라는 카롤리네의 권유를 받아들여 더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 않았다. 이후 바이마르에서는 지휘자�작곡가�교육가�사회활동가로 폭넓게 활동하였으며, 지휘에서는 슈만�베를리오즈 �바그너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창작 면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어 《3개의 연주회용 대연습곡》 《초절기교연습곡(超絶技巧練習曲)》 《파가니니에 의한 연습곡》과 소나타 �협주곡 등의 피아노곡, 《파우스트교향곡》 《단테교향곡》 《전주곡》 《타소》 《마제파》 《오르페우스》 《이상(理想)》 등의 교향시와 대표작을 연달아 내놓았다. 1861년 카롤리네와 결혼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으나 교황청이 끝내 카롤리네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 결혼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 뒤 카롤리네는 종교생활에 들어가고, 리스트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흑의(黑衣)를 두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종교성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69년 로마에서 바이마르로 돌아와서는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 상의 명기주의의 완성과 표제 음악의 확립이라는 음악 사상 매우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편곡까지 포함하여 방대한 수에 이르며 악종도 다양한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은 《헝가리 광시곡》과 《순례의 해》를 포함한 피아노곡과 교향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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