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 (1685-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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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1685-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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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1732-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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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1756-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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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1770-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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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 (1782-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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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1789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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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시니 (1792-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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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1797-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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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 (1803-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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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존 (1809-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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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1810-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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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1810-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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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1811-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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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1813-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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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1813-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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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 (1824-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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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1833-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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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상스 (1835-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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챠이코프스키 (1840-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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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볼작 (1841-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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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 (1858-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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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 (186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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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1862-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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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라우스 (1864-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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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코프 (1873-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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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 (1906-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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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래식 음악은 서양 귀족문화의 산물입니다. 위에 열거한 위대한 서양 클래식 작곡가들의 명단입니다. 26명 가운데 파가니니 -
멘델스존 - 베르디 - 브람스(?) - 드보르작(?) - 푸치니 6명 정도 외에는 모두 가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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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차르트 이전의 모든 작곡가는 일종의 음악 길드 (guild) 체제로 교회-왕족-영주-귀족 계급의 영향권 아래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전음악 작곡가 대부분이 음악 집안 출신입니다. 모차르트 때부터 시대가 변하였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의 분위기). 모차르트는
자신의 천재적인 작곡 능력으로 교회-귀족 계급의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30-40% 정도 작곡가로서 홀로 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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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의 느낌으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70-80% 정도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런 홀로서기는 고통스러운 가난을
감수한 결과였습니다. 평생 가난으로 고통 받던 베토벤은 대토지를 소유한 막내 동생 요한에게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요한은 매몰차게
거절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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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선택한 직업은 원래 곤궁한 생활을 각오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형의 가난은 형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책임도 형 스스로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 토지 소유자 동생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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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답장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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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도움은 필요 없다. 너의 설교도 필요 없다.- 두뇌 소유자 형 루드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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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끼니를 위하여 자신의 예술적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예술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그가 택한, 아니 택할
수밖에 없었던 생활 방식은 친구들이 비난을 퍼부을 만큼 지독한 구두쇠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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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유품 가운데는 (우리 시대 표현으로) 그의 스승 하이든과 함께 마신 자판기 커피 두 잔 값 300원 + 300원 = 600원 까지 낱낱이 매일 기록한 가계부가 남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베토벤은 “현실적 가난의 고뇌를 넘어 예술적 환희!” 로 승화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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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규홍, 베토벤의 가계부,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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