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Berliner Philharmoniker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는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민주적인 자치제도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금도 상임 지휘자, 오케스트라 매니저,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두 단원들의 투표에 해 선정한다.
선정된 단원은 1년간의 수습 기간을 거친 뒤에 정단원이 되며, 10년간 일한 단원은 연 혜 받는다. 베를린 필은 1년에 약 100회의 콘서트를 하는데 외국 연주도 많이 한다. 운영은 콘서트 티켓 판매, 음반 녹, 방송 을 얻는 수입으로 충당한다.
현재 총 114명의 멤버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속에 작은 단위로 활동하는 악단이 포함되어 있다. 2002년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연주하여 화제가 된 '12 필하모닉 첼리스트'(Twelve Philharmonic Cellists)를 비롯하여 브란디스 쿼텟(Brandis String Quartet), 웨스트팔리안 쿼텟(Westphalian String Quartet), 필하모닉 옥텟(Philharmonic Octet) 등도 들어있다. 또 몇 멤버들은 빈 필하모닉의 멤버들과 비정기적으로 빈-베를린 앙상블을 만들어 활동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1862년 벤야민 빌제(Benjamin Bilse)가 만든 빌제의 악단(Bilsesche Kapelle)이 그 시작이다. 처음 50명으로 구성된 이 악단은 대단한 인기 속에서 20년간 약 3천 번의 콘서트를 했으나 재정 문제와 지도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82년 폴란드 공연을 하면서 단원들은 빌제에게 불만이 커졌다. 기차 좌석은 약속했던 3등칸이 아니라 4등칸이었고 보수도 깎였다. 이에 대해 단원들은 계약 만기일이던 4월 30일 전까지 보상할 것을 요구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45명의 단원이 빌제에게서 떨어져 나와 5월 1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라는 새로운 이름의 자치단체를 결성하였고 당시 루빈스타인과 한스 폰 뷜로우를 데리고 흥행하던 에이전트 헤르만 볼프(Hermann Wolff)에게 찾아가서 '몸을 맡기고' 1882년 9월 17일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으로 첫 연주를 시작했다.
당시는 음악회에서 가벼운 식사를 주는 것이 관례였고 관객들은 식사하면서 연주를 감상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식사를 주지않았다. '음악에 집중하라'는 표어를 내걸었지만 실제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헤르만 볼프가 재정과 운영을 맡기는 했으나 초기에는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순회공연을 갔던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악기가 모두 타버리기도 했고 수입도 형편없었다. 그 시기에 지휘를 맡았던 루드비히 폰 브레너(Ludwig von Brenner)는 힘들게 이 단체를 음악적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필의 본 모습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짜 베를린 필의 시작은 초대 상임 지휘자로 꼽히는 한스 폰 뷜로우(Hans von Bulow) 부터다. 뷜로우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로 리스트에게 인정 받았으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미국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스승이자 대선배인 바그너를 만나면서 피아노를 떠나 지휘자라는 '딴 길'을 걷게 됐다. 결국 그는 바그너 작품의 지휘를 하게 됐지만 그 대신 바그너에게 부인 코지마(Cosima)를 뺏겼다.
그런 상태로 뮌헨을 떠난 뒤의 뷜로우는 마이닝겐 궁정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은 채 가끔 유럽과 미국까지 다니면서 오직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다. 마침 그의 에이전트를 하던 볼프는 손에 들어온 베를린 필의 전권을 뷜로우에게 맡겼고 두 사람은 배짱 좋게 고집스런 음악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꼽히던 '혁명 지휘자' 뷜로우는 1887년 상임 지휘자가 된 후 5년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택하여 음악의 수준을 최고로 올려놓았다. 뷜로우는 협주곡을 포함한 모든 '달콤한 음악'은 과감히 내던지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 현대에 이르는 교향곡만 연주했다. 보통 하루 저녁에 교향곡 세 편을 연주했는데, 한 번은 베토벤 9번 연주에 대해 관객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객석의 출입문을 다 잠그고' 다시 한 번 연주한 적도 있었다.
뷜로우는 그는 당시 브람스, 그리그 등과 교류하며 차이코프스키, 말러, 리하르트 쉬트라우스 등을 객원 지휘자로 초대하여 (원래 롤러 스케이트장을 개조하여 만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장을 진정한 예술의 전당으로 바꾸었다. 1892년 뷜로우가 건강이 나빠 은퇴하고 2년 뒤 사망했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한스 폰 뷜로우가 떠난 뒤, 헤르만 볼프는 그 후 7년간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리하르트 쉬트라우스(Richard Strauss) 등 여러 유명 지휘자들을 초대하더니 1895년에야 헝가리 출신의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를 상임 지휘자로 선정했다. 성격도 차분하고 지휘봉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지휘자' 니키쉬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낭만주의 작품들을 연주하며 그 서정성을 잘 표현하여 명성을 더욱 높였고 레퍼토리도 넓혔다. 브루크너, 차이코프스키,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과 교류하면서 당시로는 혁신적이던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와 말러의 작품도 연주했다. 초대한 독주자 중에는 부소니(Ferruccio Busoni), 바카우스(Wilhelm Backhaus), 카잘스(Pablo Casals), 하이페츠(Jascha Heifetz) 등도 있다. 니키쉬는 27년간이나 베를린 필을 이끌다가 1922년 사망했다.
니키쉬가 사망한 1922년 그 뒤를 이어 지휘봉을 받게 된 것은 베를린 출신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 ngler)였다. '불같은 열정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쉬의 전통을 따라 낭만주의 작품들에 주력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제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시대, 음악적으로는 후기낭만파와 아방가르드의 갈등 시대를 넘어갔다.
푸르트벵글러는 주로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작품들을 연주했으며 특히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의 독특한 해석은 큰 찬사를 받았다. 그리면서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쇤베르크의 작품에도 정성을 들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베를린 필은 많은 순회 연주를 했고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오스카 프리트(Oskar Fried),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같은 지휘자들을 초대하였다. 뛰어난 솔로이스트 초대도 아주 활발하여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도 협연했고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은 12살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세계를 휩쓸던 어려운 시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시, 독일 정부, 베를린 라디오 방송국의 후원 덕분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푸르트벵글러는 공개적으로 힌데미트를 두둔하여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Goebbels)와 마찰을 빚었고 그 결과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1935년 다시 지휘대에 서게 된 것은 정치와의 싸움에서 예술이 승리한 사례로 꼽힌다.
베를린 필의 더 어려운 시련은 1944년부터 찾아왔다. 1월의 폭격으로 연주회장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다른 장소를 빌려서 연주를 계속했다. 베를린이 함락된 것은 1945년 4월 말이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은 나치 치하의 4월에도 연주회를 했고 연합군 치하의 5월에도 연주회를 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단원들을 모아 두 음악회의 지휘를 맡았던 것은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독일인 레오 보샤르트(Leo Borchard)로 알려졌다.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동조 죄로 억류되자 5월에 보샤르트가 상임지휘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8월 23일 베를린의 한 검문소에서 운전사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는 바람에 미군 병사의 총격을 받아 보샤르트는 사망하였다.
푸르트벵글러가 구금되고 보샤르트가 죽자 다음 지휘자로 선정된 것은 루마니아 출신의 33세 청년 세르기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였다. 이때 첼리비다케와 함께 물망에 올랐던 것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무척 견제했으며 그 때문에 첼리비다케를 선호했다고 한다. 울름과 아헨의 오페라하우스를 거쳐 빈 필,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 베를린 국립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며 무섭게 성장한 신예 카라얀이 자신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것을 푸르트벵글러는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인 것이다.
카라얀을 제치고 지휘봉을 잡은 '괴팍한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히틀러 시대에 단절되었던 외국 음악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현대작품들을 많이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으며 외국 순회연주도 시작했다. 1947년 푸르트벵글러가 석방된 뒤로 두 사람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그런데 첼리비다케는 중요한 수입원인 녹음을 못하도록 거부했고 또 폭군적이고 완벽주의 성향으로 단원들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며 맘에 들지 않는 단원에게 폭언도 서슴치 않아서 단원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첼리비다케의 놀라운 지휘 능력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1955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을 상임지휘자로 선정했다. 빈과 런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얻은 카라얀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음반 녹음에 대해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폴 로빈슨이 쓴 카라얀 전기를 보면 1955년 베를린 필 단원들은 미국 순회연주를 위한 지휘자로 카라얀을 최우선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러자 카라얀은 이를 수락하면서 '그 대신 나를 종신 상임 지휘자로 선발해 달라'고 조건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런 거래(?)에 의해 순회연주를 다녀 온 뒤 카라얀은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가 됐다고 한다.
'황제 지휘자' 카라얀의 길고 화려한 재임기간 중 베를린 필하모닉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품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주요 20세기 작품들을 빠트리지 않았고 매 시즌 중 다섯 번의 콘서트는 20세기 작품으로 연주하며 10여 편의 현대 작품들을 초연하였다. 카라얀과 함께 순회공연과 음반을 녹음하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세계적 명성과 베를린 필하모니커(Berliner Philharmoniker)라는 애칭도 얻었다. 새 연주회장도 지었다. 1963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세워진 켐퍼플라츠의 필하모닉 홀(Philharmonie on Kemperplatz)은 건축가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이 디자인한 것으로 좌석 2천 석에 인상적인 슈케(Schuke) 오르간까지 설치되었으며 1987년에는 챔버 뮤직홀이 증축되었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2년 여성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 사건 때문이다. 카라얀은 최초로 이 여성 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뽑자고 했으나 보수성향이 강한 단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화가 난 카라얀은 '종신 상임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하되 녹음을 비롯한 수익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1년간의 수습으로 자비네 마이어를 활용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지만 카라얀과 단원들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35년 가까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끈 카라얀이 1989년 지휘대에서 내려와 세상을 떠나자 지휘봉은 그 해에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로 넘어갔다. 아바도는 전통적인 고전 낭만 작품들과 함께 20세기 작품을 더 많이 연주하였고 '파우스트', '고대 그리스 드라마', '셰익스피어' 등 주제가 있는 콘서트를 시작했으 처음로 오페라 콘서트에 포함시켰다.
아바도 시기에 유럽의 클래식 유행 중 하나는 원전악기와 정격연주였다. 이것은 통상적인 연주에서 벗어나 작곡가의 의도와 작품 자체에 더욱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움직임은 아바도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를린 필은 작품에 대해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는 연주법을 찾아내어야 했다.
12년을 이끈 아바도에 이어 2002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도록 선정된 것은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 경(Sir Simon Rattle)이다.
오케스트라를 철저히 통제하여 좀 더 세밀한 음악을 표현한다는 사이먼 래틀이 12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베를린 필하모닉과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음악을 들려줄 지는 세계의 모든 음악 팬들이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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