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바꾼 고혈압… “심신 불안·허약 땐 중요 결정 미뤄야”
|
|
의과대학 강의실에서 심장내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퀴즈를 낸다. 환자는 50대 중반부터 고혈압이 생겼다. 혈압은 해가 갈수록 올랐고, 높은 혈압으로 심장 박동을 해야 했기에 심장 근육은 헐떡였다. 나중에는 심장 근육 힘이 빠져, 혈액을 전신에 제대로 뿌리지 못했다. 몸이 붓고 숨도 찼다. 그 상태서 일주일간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얼마 안 가 혈압이 더 치솟았다. 결국 뇌출혈로 죽음을 맞았다. 향년 63세였다.
|
교수가 여기까지 사례 설명을 하고 얄타회담 사진을 보여준다. 처칠 영국 총리,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서기장이 나란히 앉은 장면이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63세 심혈관 사망 환자가 셋 중 누구일 것 같으냐고 묻자, 학생들은 애연가 처칠이나 애주가 스탈린이라고 답한다. 정답은 루스벨트다. 이는 연세대 의대 심장내과 하종원 교수 강의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하 교수는 학생들에게 고혈압을 방치하면 개인적으로 큰 불행이자, 역사도 바뀔 수 있다는 의미로 얄타회담 얘기를 꺼낸다고 말한다.
|
얄타회담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2월, 미국·영국·소련 수뇌부가 모여 다가올 독일의 패전과 이후 처리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여기서 일본 패전 후 한반도 문제도 거론했는데, 얄타회담은 미·소 분할 신탁통치 시발점이 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 연안 흑해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열린 이 회담에 참석할 당시 심장병으로 몹시 힘들어했다. 그의 고혈압은 1937년부터 심해졌는데, 수축기 혈압이 160(mmHg·정상은 120 이하)대였다. 현재 기준으로 당장 약물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얄타회담 시기에는 200을 넘어섰다. 심장 순환 능력이 떨어진 울혈성 심부전으로 강심제도 복용했다. 이런 이유로 루스벨트는 대서양을 건너는 긴 여행을 싫어했지만,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거꾸로 자신의 병세를 내세워 멀리 여행 갈 수 없다며 회담 장소를 얄타로 고집했다고 한다.
|
만약 루스벨트의 심신이 왕성해서 소련을 좀 더 견제하는 식으로 회담이 이뤄졌다면 우리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일본에 친근감을 가졌던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더 오래 했으면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어찌 됐건 얄타회담 결과로 소련 공산주의가 전 세계에 확산했고, 동서 냉전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당시 의학은 고혈압 자체를 치료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심장 근육이 두꺼워지는 심장 비대가 오면 그때야 치료에 나섰다. 아이로니컬하게 루스벨트 사후 고혈압 치료 기준이 강화됐다. 무증상, 무후유증 고혈압도 약물치료를 하게 됐다. 의학은 ‘환자’를 통해 거듭나기 마련이다.
|
얄타회담은 고려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이헌정 교수 강의에도 등장한다. 건강 서적 ‘생체 시계를 알면 누구나 푹 잘 수 있다’의 저자인 이 교수는 루스벨트의 시차 적응 실패를 지적한다. 루스벨트는 미국 동부에서 7시간 시차의 얄타로 날아 갔다. 동쪽으로 간 여행이었다. 해가 뜨는 방향으로 멀리 빠르게 이동하면, 새벽 깊은 잠이 모자라서 시차 적응이 특히나 어렵다. 당시 장거리 제트기 여행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시차에 대한 개념이 약했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얄타에 도착한 루스벨트는 낮에 무척 졸려했으며, 밤에는 불면으로 힘들어했다. 회담 내내 어서 미국으로 돌아가길 바랐다고 한다. 이 교수는 그 결과로 동북아에서 소련의 패권이 강화됐다고 주장한다. 2002년 월드컵서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것도 동쪽 여행에 따른 시차 적응 실패 결과라고 이 교수는 주장한다.
|
역사는 되감을 수 없어도 건강은 되돌릴 수 있다. 사회적 행동이 수상쩍을 때는 먼저 생물학적 상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엄마의 급작스러운 우울 행동은 폐경기에 여성호르몬이 들쭉날쭉 널뛴 결과일 수 있고, 자상하던 아빠의 고압적 신경질은 뇌 기능 저하에 따른 일시적 인지 장애이며, 얼굴 마주치고도 무심하게 지나간 지인의 행태는 시야가 좁아진 녹내장 증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심신이 불안정하거나 허약해졌다고 생각할 때는 결혼·이혼·은퇴·전직 등 중대한 사회적 결정을 미뤄야 한다. 건강한 상태로 돌아와 적합한 행동을 하는 게 낫다. 얄타회담은 질병과 사회 활동 간에는 운명을 가를 수 있는 얄궂은 관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
입력 2021.02.23
|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