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10년 위기를 이겨낸 사람들] <1> 청국장 생산업체 운영 이원직씨. 보증 쓴맛 우울한 귀향→40만원 밑천 포장마차→빈집 빌려 청국장 식당→美에 1억상당 수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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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안나는 청국장으로 재기에 성공한 이원직 사장. 지난해에만
연 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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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청국장 생산업체 '천혜땅'. 회사 간판만 없다면 주변 농가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한
건물이다. 내부로 들어서니 청국장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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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재기한
이원직(45) 사장의 사업장이다. 그는 지금은
어엿한 사장이지만 IMF 직전부터 거의 10년 가까이 삶의 쓴 맛을 제대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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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한산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 때
상경한 그는 구로공단에서 공원생활을 하다 27세때인 1988년 손목시계 조립공장을 차렸다. 종업원 9명을 두고 대기업에
시계를 납품하면서 한달에 1,500만원씩 벌었다. 돈을 모아 대형횟집을 냈는데 이곳에서도 '갈퀴로 돈을 쓸어 담는다'고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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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94년 사업하는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공장을 닫아야 했다. 횟집에도 손님이 끊겼다. 그는 "지금 와서 보니 그게 IMF 전조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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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에 정이 떨어진 그는 마침내
부인과 어린 아들 딸을 설득해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전재산을 정리하니 1억2,000만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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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 기러기를 기르면 고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주변의 말에 전재산을 투자했죠. 하루 사료값만 25만~30만원이 드는 고비용이었지만 시중 판매가가 1마리에
14만원이나 돼 잘만 하면 목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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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사업을 펼쳐나가던 즈음 IMF가
닥쳤다. 판로가 막히고 사료 값을 댈 수가 없었다. 결국 1998년 초 남아있던 기러기를 주변에 식용으로 나눠 주고 사업을
접었다. 수중에는 달랑 40만원만 남았다. 귀농 1년 반 만에 1억원이 넘는 돈을 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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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산을 말아먹었으니 창피하고 죽고
싶더라구요. 하지만 나를 믿고 고향으로 따라온 가족들 얼굴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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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40만원을 밑천으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밤낮없이 장사를 한끝에 4개월만에 500만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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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식당을 열었다. 사촌형 소유의
빈집을 빌려 청국장과 순대국을 팔았다. 식당에 딸린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잠을 자면서 그는 "앞으로 자식들 밥을 굶기지만
않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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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하면서 그는 농촌지역에 배달문화를
도입하는 등 장사수완을 발휘했다. 들판과 낚시터 등 주문이 있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낚시터 좌대마다
번호표를 붙인 아이디어로 주문을 받으면 신속하게 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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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이 인기를 끌자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식당을 하면서 모아놓은 2억원을 들여 공장터를 사고 기계와 황토 발효실을 갖춰 2004년 9월 공장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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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농업기술원과 대학교수 등의 협조를 받아
생청국장과 분말, 환제품 칼국수 캔음료 캔디 등 신제품을 계속 개발했다. 시장 개척을 위해 각종 식품행사에는 빠짐없이
참가했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찜질방에서 머물면서 제품 홍보를 했고 마케팅을 배우려 대학원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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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부터는 냄새 때문에 청국장을
먹고 싶어도 못 먹던 재미동포들에게 '고향의 맛'을 선사하며 1억3,000만원어치를 수출했다. 지난 28일에는
4,000만원어치를 더 선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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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부족으로 대출을 못받아 공장이 운영난을
겪을 때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4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인데 망해도 땅은 남을 것이라는 배포가 생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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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은 지난해 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앞으로 해마다 매출이 배 이상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기계설비 투자가 끝나 올해에는 수지균형을 맞춰 흑자로 전환될
것으로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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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주영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 같아요. 몸만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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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글ㆍ사진 허택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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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he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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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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