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대하고 앉으니 정 많고 소박한 한국인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난다.
얼굴에는 웃음이, 말에는 겸손함이 담겨 있다. 20여년간 미국생활을 한 사람 같지 않다.
그러나 입을 열자 독특한 시각(視角)이 기자의 귀를 사로잡는다. 한국에서는 듣기 어려운 국제적 한상(韓商)의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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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주의 의류무역업체인 리갈웨어의 권혁규(權爀珪53) 사장은 한국중국필리핀 등에서 캐주얼 웨어를
납품 받아 미국 내 유대인 도매상이나 미국 백화점에 납품한다. 업무가 업무인 만큼 중국 출장이 잦고 항상 유대인
의류무역상들과 접촉한다. 세계 최대의 장사꾼을 자부하는 유대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셈이다. 그래서 권
사장에게 이 두 장사꾼들의 상술(商術)에 대해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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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혁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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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요, 중국 사람들 때문에 죽어납니다. 요즘 뉴욕 맨해튼
6번가 주변에서 의류무역업을 하던 유대인들이 중국인들에게 질려 업종을 변경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요. 제 주변에만
해도 10여명이나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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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중국인에게 당하는 이유는 이렇다. 미국 내 유대인들은 1970~1990년대에 한국에서 의류를 납품 받아
미국 백화점에 공급했다. 유대인이 이익을 남기는 전형적인 방법은 제품의 각종 흠과 납기일 지연 등을 이유로
20~30%씩 납품 가격을 할인하는 것. 한국의 봉제공장 사장들은 매달 직원들의 월급을 줘야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 클레임(보상 요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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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국 사장들은 느긋하다. 노동 인력이 풍부하고 직원들이 봉급을 회사에 맡겨 뒀다가 1년에 한 번씩 찾아가는
경우가 많아 기업주들의 자금 압박이 한국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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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업체와 10년 이상 거래한 유대인 A씨는 최근 광저우의 의류업체에 주문한 바지 3000벌이 사양과 달라 클레임을
청구했다. 그러나 중국인 거래상에게서 가격을 할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는 할 수 없이 헐값 처분 해야
했다. 다른 유대인B씨는 납기 지연에 항의했다가 싫으면 그만두라며 면박을 당하고는 거래선을 파키스탄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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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대국(大國) 기질에 자존심이 아주 세요. 그래서 째째하게 물건값 깎아가며 유대인에게 머리 숙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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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중국인에 당하면서 한국 의류무역업체들은 뜻밖에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 유대인 공급량이 줄어들자 JC페니
등 미국 백화점들이 한국인 의류업체에 주문량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업체들은 중국 내 조선족을 이용해
중국업체들을 통제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은 중국에 동족(同族)이 없다는 것도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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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사장은 조만간 국제비즈니스 업계에서 유대인과 중국인 간의 상권대전(商權大戰)이 벌어질 것이라며 두 민족을
다 겪어본 내 생각에는 중국인이 한 수 위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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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사장은 원래 은행원 출신이다. 조흥은행에 다니던 1983년 아내 신정화(辛貞花51)씨의 손을 잡고 적금을 깨서
뉴욕대 경영대학원에 유학했다. 그리고 MBA를 취득한 뒤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기 위해 당시 한국이 가장 강점을 갖고
있던 의류업에 손을 댔다.
그러나 금융업에서 의류업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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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국 의류 도매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사람을 믿지 못해 물건을 조금씩 주고, 만족스러우면 주문량을
늘려가는 방식을 썼다. 유대인답게 품질관리가 몹시 까다로웠다. 수년 뒤 신뢰가 쌓이자 주문량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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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에는 중국인 거래선이 문제였다. 주문량은 산더미같이 쌓여있으나 중국인들은 제대로 된 품질의 옷을 제 시간에
공급하지 못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이제 권 사장은 유대인과 중국인을 상대하는 노하우를 상당히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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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김기훈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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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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